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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뉴스 편집실
길을 비켜라, 헐크가 나가신다
- 박진영
- 조회 : 2830
- 등록일 : 2017-04-15
| 길을 비켜라, 헐크가 나가신다 | ||||||
| [글케치북] 촛불집회, 산수유, 광화문, 지하철역,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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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 참 좋은데 말할 방법이 없네?” 망할. “야근하기 싫은데 말할 방법이 없네”다. 밤 11시다. 토요일, 내가 일하는 승리마트는 6시에 문을 닫았다. 촛불집회가 있어서다. 과일파트 주임도, 정육파트 막내도 초를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갔다. 저마다 광장의 캡틴아메리카로, 토르로, 스파이더맨으로 변신해 거대한 세력과 싸울 테지. 그런데 어벤져스에서 빠져선 안 될 헐크는 어디 있냐고? 헐크는 지금 음료 코너에서 산수유 팩을 정리하는 중이다. 낮에 헐크로 변신한 죄책감에 대한 반성이랄까. 오늘 후임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화를 냈다. 후임의 눈물마저 보았다. 야근까지 시킬 순 없었다. 야밤에 내가 산수유 팩을 정리하고 있는 이유다. 광장에서 벌어지는 영웅들의 싸움에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 눈길을 줄 틈이 없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게다. 지금 나에겐 승리마트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2년이란 비정규직 계약이 끝나간다. 후임이 잘못해도 내가 잘못한 것 같이 찔리는 요즘이다. 점장님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순간 끝이다. 언제 길바닥에 나앉을지 모른다. 지금 당장은 산수유 팩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각종 음료수들을 제대로 정리해 누가 봐도 깔끔하게 보이도록 하는 게 우선이다. 특히 손님들보다 점장님의 눈을 사로잡아야 한다. 재계약에 성공하는 것, 그것만이 오로지 비정규직인 내겐 이기는 길이다. 이제 산수유 2박스만 정리하면 된다. 망할 놈의 산수유. 하나 까먹어 버릴까 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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