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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저리 이야기
김세훈-민정음의 길은 서울신문에서도 계속 된다
- 수*
- 조회 : 2499
- 등록일 : 2022-01-20
처음 만난 날, 우리는 쇼펜하우어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좋아한다고 했고, 나는 좋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자가 되려면 염세주의 철학자를 멀리 해야 한다고, 나는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쇼펜하우어를 좋아하는 기자 지망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습니다.
두번째 만난 날, 우리는 술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술을 못마신다고 했고, 나는 마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술 대신 사이다를 마시겠다고 그가 저항했습니다. 그는 혼자 사이다 세 병을 마셨습니다. 삼겹살 먹고 나오는 길, 그는 전에 못보던 행동을 했습니다.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습니다. 과도하게 당분을 섭취하면 만취 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습니다.
지난해 봄, 그는 혼자 한센인 마을을 구경 다녀왔습니다. "그걸 기사로 써보자"고 했지만, 그는 저항했습니다. 나중에 다른 친구들이 발제하여 구성한 취재팀에 억지로 가담시킨 뒤에야 그는 그때 봤던 것을 기사로 썼습니다. 취재를 열심히 하는데 발제는 안하고, 글쓰기를 무척 좋아하는데 기사는 잘 안썼습니다. 발제부터 해놓고 취재를 시작하고, 기사 쓰면서 글쓰기가 좋아졌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서로 어울리는 점이 하나도 없었지만, 우리는 억지로 더 만났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좋은 글을 좋아했고, 나도 그랬습니다. 그는 단비뉴스에 올라오는 모든 글에 불만이었고, 나도 그랬습니다(흠흠). 예수가 물 위를 걷듯이 문화관 주변을 둥둥 떠다니며 자신의 세계에서 지내던 그는 지난해 가을부터 산상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좋은 말글(정음)로 백성을 깨우쳐야겠다(훈민)고 결심한 것입니다. 제천의 공기는 너무 맑은데, 세저리의 말글은 너무 혼탁하다 여긴 것 같습니다.
그는 한글만이 아니라 영어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세저리의 유일한 동아리 '해외저널리즘연구회' 초대 회장을 맡아 퓰리처상 수상작을 공부했습니다. 단비뉴스에서 '김세훈민정음' 특강을 맡던 무렵, 나에게 영어 책도 선물해줬습니다. 1970년대 미국 뉴저널리즘의 기수인 톰 울프의 영어 원서였습니다. 톰 울프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정말 희귀합니다. 내가 톰 울프에 관심이 많다는 점을 알아낸 것도 희한한 일입니다. 아무래도 그는 나의 영어 실력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그는 "교열 기자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올바른 단어, 좋은 문장, 훌륭한 글을 아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책 선물까지 받은 처지라서 "너한데 잘 어울린다"고 격려했습니다. 덜컥 그 일을 시작할 줄은 몰랐습니다. 14기 김세훈이 <서울신문> 교열 기자로 일하게 됐습니다. 공개 채용에 응시해 합격했습니다. 1월 3주부터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집값 비싸다는 서울에서도 무려 동대문 근처에 원룸을 구했답니다. 사이다 값 아껴서 목돈을 마련해둔 것 같습니다. 일단 1년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나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고기, 사이다, 쇼펜하우어, 그리고 잘 다듬어진 글을 좋아하는 김세훈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완전히 알아 차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이의 오랜 신경전 끝에 그는 이제 맥주 두어서너 잔을 마시게 됐습니다. "마셔보니 맛있더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과제가 남았습니다. 제발 그 머리 좀 어떻게 해야 합니다. 쇼펜하우어를 이야기하던 첫 날부터 내가 말했었는데, 아직 그는 저항하고 있습니다. 첫 월급 받으면, 서울신문사가 있는 광화문 근처 좋은 뷰티 살롱에 가십시오. 버섯 머리와 이별하십시오. "깎아보니 멋있어지더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