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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저리 이야기
가슴이었고 눈물이었다
- 임* 준
- 조회 : 8258
- 등록일 : 2017-09-26
선희는 유치원 교사 출신답게 낭랑한 목소리로 공로패를 읽어내려갔다. “…귀하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랑쌤이니까.” “고맙구요. 사장 선임을 통보받은 지지난주 목요일 세저리가 떠올랐습니다,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세저리는 나에게 무엇이었던가. 가슴이었고 눈물이었다’” 좌중이 숙연해졌다. “여러분, 2%가 돼야 언론사에 들어갑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반드시 저널리스트의 꿈을 실현하길 바랍니다.” 랑샘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고개를 한번 떨궜다가 우리를 바라봤다. “여러분이 눈에 밟힙니다. 비록 이곳을 떠나지만 마음은 여기에 남아있을 겁니다. 좋은 저널리스트가 돼 세상을 바꿔주십시오.”
민주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 의미를 얘기해.” 봉샘이 민주에게 주문했다. “모르겠어요. 편지 쓸 때부터 울컥했어요…. 피디하고 싶었는데…. 포기할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랑샘이 ‘복도에서 신입생 활기가 느껴진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세저리 학생이 된 것 같았어요. 수업시간에는 기숙사는 괜찮냐고 물어봐주셨어요.” 민주는 눈물을 삼켜가며 겨우 말을 이어나갔다. “봉발대발 다큐 찍을 때 딜레이 됐는데… 화 안내고 피드백 잘해주셨어요.” “리포팅 지도를 받았는데, 발성이 그것밖에 안되니” 제샘의 말에 우리는 웃음이 피식 나왔다. 민주의 눈물샘도 조금 멎었다.
“좋은 세저리에서 쫓겨났어. 불쌍한 거야” 요샘의 농담에 우리는 또 웃음이 터졌다. “랑샘을 가장 존경한 사람은 빨리 나와서 같이 케이크 잘라.” 요샘이 재촉할 때, 하늘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랑샘은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여줬다. 봉샘은 “시험 안치고 뒷문으로 들어간 거야”라며 툭 던졌다. 롤핑 페이퍼를 남기지 않은 윤석은 카펫에 앉아 있다 일어났다. “언젠간 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헤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안 썼어요.” 그 말을 듣던 연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마다 한마디 할 때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경청했다. 앞으로 교육방송 하시는 걸 지켜보겠다, 168번째 합격자 아니냐 등.
침울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요샘은 분위기를 반전하려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타임이라며 각자 랑샘에게 서운했던 일을 털어놔보라고 했다. 맥주를 두어 잔 걸치고 얼굴이 달은 현석은 랑샘과 자신 사이의 비화를 폭로했다. “예비언론인 캠프 때 몰래 찾아가서 잘 봐달라고 말했어요. 그 전에 면접봤을 때는 봉샘은 저를 지적했는데 랑샘은 유일하게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자 봉샘이 랑샘 일화가 하나 있다며 운을 뗐다. “랑샘 올 때 자기가 노조활동 열심히 한 걸 자소서에 미주알 고주알 썼어. 아 이런 꼴통….” 봉샘 특유의 농담에 여기저기서 큭큭댔다. “이사회 가서 설득한다고 고생했다니까.”
랑샘은 자리를 돌아다니며 우리의 잔에 맥주를 채워줬다. 봉샘이 건배제의를 했다. “랑샘 오니 연못에서 빵빠레가 터지고 축하공연까지 하네. 건배사는 승승장구야. 정점은 EBS 사장되는 게 아니라 세저리로 복귀하는 거야. EBS를 다큐왕국으로 만들고 왕이 되어서 복귀해야지. 내가 ‘승승’하면 다같이 ‘장구’해.” “승승” “장구!” 발언 기회를 얻은 선 부장님은 “방송계 잔뼈가 굵을 텐데 이루지 못한 철학을 EBS에서 펼치길 바랍니다”라고 응원했다.
선희가 사장 선임 소식 들었을 때 어땠냐고 랑샘에게 물었다. 그러자 요샘이 “대변인으로서 말씀드릴게요. 한마디로 ‘슬펐다’.” “대변인을 오늘부로 교체하겠습니다”라고 랑샘이 재치있게 받았다. “당신 EBS맨 됐으니 KBS얘기 그만하라고 내부에서 그럽디다. 나는 EBS 간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어요. 누가 지원해보라고 했어요.” 랑샘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난 여전히 KBS후배들이 눈에 밟혀요. 도망갔다는 죄의식이 있었지만, 어제부로 버리기로 했습니다.”
상연이 한 손에 사과를 들고 랑샘과 쌓은 추억을 말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결국 주저 앉았다. 상연은 “항상 몸 잘 챙기시고 잘하세요.”라며 사과를 들어보였다. 요샘은 “낼 미디어부 회식하는데 회식비 주고 가세요”라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랑샘은 “이번엔 요샘한테 사달라고 그러고 나중에 따로 먹자고.”라며 능글맞게 우리를 쳐다봤다. “사장 돼서 바뀐 게 있습니까?” 문샘이 물었다. “차가 있습니다. 자동으로 문이 열려요.” 랑샘이 덤덤하게 말했다. 요샘은 사장실에 화장실이 있는 것은 기밀이라고 말했다. 파업같은 게 일어났을 때 직원들이 봉쇄하면 화장실을 못 간다며 부연설명 했다. “이건 요샘의 해석이야!” 랑샘이었다.
우리는 하늘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화장실로 달려가는 것을 봤다. 평소 말없던 진우가 랑샘에게 질문했다. “두 분은 고배를 마셨는데, 사장으로 당선된 노하우를 알려주세요.” 요샘이 “지금은 얼굴 패권 시대야. 기자와 피디의 차이점은 기자는 못생겼고, 피디는 잘생겼다는 거지”라며 대신 답했다. “내가 성형을 하든지 해야지….” 봉샘이 고개를 떨구며 말끝을 흐렸다. “한 사람을 띄우고, 두 사람을 죽이는 건 아니야. 질문을 가려서 하도록 해.” 제샘이 농담 섞인 일침을 가하자 우리는 또 폭소했다. “인간성 나쁜 진우를 대신해서 수아가 말해봐.”라고 요샘이 수아를 봤다. 수아는 입을 열자마자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랑샘이 숱한 여자를 울리네. 연주도 한마디 해.” “샘이 저번에 미디어부 기사 보고 술 드시고 전화했어요. 전화해선 ‘글 못쓴다’고 그랬어요. 그때 많이 울었어요 사실….” 연주가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샘은 저를 신경써주고 챙겨주신 것 같은데, 피하려 해서 마음에 걸리고 죄송스러웠어요.” “ 상처를 주면 감동 받는 스타일들이네. 특이해 다들.”
평소 과묵하던 지영이 할말이 있다며 일어났다. “랑샘에게 감사한 게 있어요. 1학기 방작 수업 때 제 글에 악평을 하셨어요. 글 말미에 ‘최악의 글’이라고 쓰셨어요. 그걸 지갑에 넣고 다녔죠. ‘아, 내 실력이 부족하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랑샘 앞에서 울었던 기억이 나요. 낯선 사람 앞에선 울지 않는데 울었어요.” 지영은 담담하게 말해나갔다. “랑샘이 ‘공부는 목숨 걸고 해야 한다’라고 하셨는데, 저는 ‘이걸 목숨 걸고 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런데 올해 다시 준비하며 ‘목숨 걸고 해야 한다’는 말씀이 귀에 들어왔어요.” 이어 하늘의 차례였다. 말 문을 열자마자 울컥했다. “캠프 때 랑샘이 저를 안아준 게 기억났어요. 저는 ‘회자정리 거자필반’ 이 말이 기억나요. 꼭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마음 줘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은 가슴이었고 눈물이었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잘 될 거라 생각합니다. 봉샘이 다시 오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공동운명체입니다. KBS와 MBC가 싸우고 있지만 EBS는 내가 살리겠습니다. 내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세상을 바꿔봅시다. 고맙습니다. 제샘 고맙습니다. 봉샘 고맙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장해랑 선생님이 우리를 보며 엷게 웃었다.